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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달의 서신

by 놀고싶은날 2024.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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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우뚝 솟은 달은 사람들에게 은은한 빛과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누군가는 그 아래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또 다른 이는 그리움을 달빛에 새긴다. 이 글은 그렇게 밤마다 전해지는 달의 숨은 편지, ‘달의 서신’에 대한 이야기다.

옛 전설에 따르면, 달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달빛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운명을 비추어 왔다는 점이다. 때로는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의 뺨을, 때로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영혼의 흔적을, 때로는 자신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방황을 말이다. 그래서 달은 사람들의 상실과 기쁨, 그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편지처럼 품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달의 서신’은 어떻게 전해지는 걸까? 어느 시인은 달빛을 ‘밤하늘을 가르는 은빛 실’이라 표현했다. 그 말처럼 달빛은 하늘을 가로질러 가늘게 뻗어 내려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곳까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종종 이슬에 맺혀 어느새 초승달의 곡선을 따라 펼쳐지고, 또 때로는 구름 속에서 방황하다가 한밤중에 깨어난 사람들의 창문 틈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꿈속을 서성이는 달빛은, 언젠가부터 우리의 고독과 바람, 그 모든 것을 천천히 받아 적어 ‘서신’ 형태로 간직하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서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종이 위에, 달이 직접 그리는 듯한 미묘한 필치로 쓰여진다고 한다. 안타까운 눈물에서부터 황홀한 환희에 이르는 온갖 감정이 줄글로 이어져, 노을이 지는 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차곡차곡 기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달이 맑은 날, 어느 골목에서 빛의 잔해들이 교차하는 순간에, 사람들은 달이 쓴 작은 문장 하나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곧 ‘누군가를 지독히 그리워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는 뜨거운 간절함’일 수도 있다.

옛사람들은 달의 서신을 ‘달빛에 비친 그림자’로 파악하기도 했다. 가령 크고 둥근 보름달이 떴을 때, 길거리에 드리운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평소와 다른 형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고 믿었다. 바람의 흔들림 속에서도 꿈쩍 않는 어두운 실루엣이 불현듯 ‘나’의 내면을 응시하는 느낌을 줄 때, 혹은 달빛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번지는 그림자가 낯설게 다가올 때, 그것이 바로 달이 우리에게 건네는 서신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나 신화, 문학 작품 속에서 되풀이되며 전해져 온 낭만적 가정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 위 달을 향해 마음속 이야기를 전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거나 기도를 올리면 왠지 달이 받아줄 것만 같은 위로가 찾아온다. 외로운 이가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며 한숨을 쉬면, 달은 묵묵히 그 순간을 들여다보며 한 조각의 서신을 써 내려간다고도 한다. 이렇듯 달의 서신은 인간의 내면과 밤의 신비가 교차하는, 아주 조용한 교감의 흔적이다.

실제 달은 바다의 조수 간만을 이끌어 내는 중력을 지니고 있고, 빛나는 부분도 태양을 반사하는 것일 뿐이기에 과학적으로 보면 그저 한 조각의 위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달에 로맨틱한 상징을 부여해 왔다. 그 심리적 투영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정적 휴식처나 위안의 공간이 되어 주기도 한다. 때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픔을 마치 달이 전해 줄 ‘서신’으로 떠넘기듯 내보내기도 하는데, 그 행동 자체가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져 숨 쉴 틈을 주는 것이다.

이제 막 정신없는 하루를 마친 이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달이 오래전부터 전해 왔다는 서신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달은 누군가의 눈물과 웃음, 다짐과 후회를 인내심 있게 거둬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그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날, 우리는 우리가 흘려 보낸 마음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을 듯 보였던 그 깊은 속내는 실은 오래도록 어딘가에 머물러, 언제든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달의 서신’은 달에서부터 오기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가 품고 있는 모든 바람과 추억, 애틋함과 슬픔이 하나의 언어가 되어 달빛을 타고 흐른다면, 달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조용히 새겨 둘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가 스스로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나 소망도 어느 고요한 밤, 달이 비추는 창가에 다시 찾아와 손편지처럼 펼쳐지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달은 그저 은은한 불빛을 뿌릴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 둔다. 달의 서신은 그래서 단지 ‘밤하늘에 떠 있는 위성’을 향한 동경이 아니라, 꿈과 희망, 회한과 용서를 모두 보듬는 상징적 끈이 된다. 글과 말로 다 전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결국 달빛을 매개로 전해지며, 소중한 서신 한 장이 되어 우리 가슴속에 남는다. 비록 문장의 형태로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아도, 언젠가 깊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자신을 빛으로 바꿀 날이 올 것이다.

이제 잠시 눈을 감고 달의 서신을 떠올려 보자. 오늘 우리가 달빛에 맡겨 보낼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랑의 고백일 수도 있고, 조금 늦었지만 전하고 싶은 사과일 수도 있다. 혹은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소망이나, 더 이상 달성할 수 없는 꿈일지라도 좋다. 달은 서툰 문장이라도 기꺼이 받아 줄 것이며, 언젠가 우리가 다시 달빛 아래 서 있을 때 되돌려 줄지도 모른다. 그때 달의 서신은 더 이상 먼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빛의 언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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