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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돼지' 비텔리우스

by 놀고싶은날 202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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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 재위: 서기 69년 4월 ~ 12월)는 로마 제국의 제8대 황제로, 로마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해로 알려진 '네 황제의 해'에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 군림했다. 그의 통치는 사치와 향락, 그리고 정치적 무능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돼지'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다. 비텔리우스의 생애는 제국의 권력이 얼마나 쉽게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자, 로마 역사에서 정치적 혼란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비텔리우스의 생애와 배경

1. 출생과 가문

비텔리우스는 서기 15년경 로마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Lucius Vitellius)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신임을 받아 집정관과 시리아 총독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비텔리우스는 이처럼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서 성장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야망보다는 향락과 도박에 빠진 인물로 알려졌다.

2. 정치 경력

비텔리우스는 초기 경력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네로의 후원을 받아 집정관과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다. 아프리카 총독 시절에는 비교적 공정한 통치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정치적 역량보다도 로마 황실과의 친분이 그의 출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네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며 친황제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네 황제의 해와 비텔리우스의 황위 등극

1. 네 황제의 해

비텔리우스는 네 황제의 해(서기 69년)라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해에는 네로의 뒤를 이은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 오토(Marcus Salvius Otho),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까지 네 명의 황제가 연달아 즉위하며 제국의 정국이 요동쳤다. 네 황제의 해는 군사적 충돌과 권력 투쟁의 연속이었고, 각지의 군단들이 자신들이 지지하는 황제를 옹립하며 내전이 벌어졌다.

2. 황제로 선포

비텔리우스는 69년 초,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와 수페리오르(상하 게르마니아)에 주둔한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당시 게르마니아 지역의 군단은 네로 사후 로마 정권에 대한 불만이 깊었고, 갈바 황제의 인기가 낮아지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로 결심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갈바와 오토에 맞서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3. 오토와의 대립

비텔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지역의 군단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69년 4월 베드리아쿰(Bedriacum) 전투에서 오토의 군대를 격파하며 황위에 올랐다. 오토는 패배 후 자살하며 비텔리우스의 승리를 인정했다. 비텔리우스는 이로써 로마의 황제로 공인되었으나, 그의 통치는 곧 혼란과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비텔리우스의 통치

1. 사치와 향락

비텔리우스는 황제로 즉위한 뒤 로마 역사에서 가장 사치스럽고 방탕한 통치를 펼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주로 연회와 축제에 몰두하며, 과도한 사치를 일삼았다. 연회에서 하루에 수천 석의 금화가 소모되었고, 특히 그의 유명한 "파르티아식 만찬"에서는 2천여 마리의 고급 요리가 제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향락은 국가 재정을 크게 악화시켰다.

2. 무능한 행정

비텔리우스는 국가 행정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고, 정치를 측근들에게 맡겼다.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는 민심을 잃게 했고, 로마의 귀족 및 시민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게르마니아 군단의 장군들과 자신의 측근들에게 지나친 보상을 지급하며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는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더욱 부추겼다.

3. 베스파시아누스와의 대립

비텔리우스의 무능한 통치는 동부 지역의 로마 군단들에게 반발을 샀고, 유다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스파시아누스가 동방 군단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유다이아 전쟁을 맡기고, 이집트와 시리아 군단을 동원해 로마로 진격했다. 이에 따라 비텔리우스는 다시 내전을 맞게 되었고, 그의 권력 기반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몰락과 최후

1. 패배

69년 12월,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는 로마로 진군하여 비텔리우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두 번째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의 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고, 그의 지지 기반이 무너졌다. 로마 시민들조차 비텔리우스를 지지하지 않으며 베스파시아누스를 환영했다.

2. 죽음

비텔리우스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려 했으나, 69년 12월 22일 로마에서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비텔리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로마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뒤 처형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평가와 의의

1. 부정적 평가

비텔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치와 향락, 그리고 정치적 무능은 그의 통치를 단명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로마의 돼지"라는 별명은 그가 얼마나 사치스럽고 비윤리적인 생활을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역사적 의의

비텔리우스의 짧은 통치는 로마 제국 내 황제의 권력이 군대의 지지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군단의 충성을 기반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 군대마저도 그의 무능함에 등을 돌렸다. 비텔리우스의 몰락은 로마 제국이 정치적 혼란기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비텔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혼란기 속에서 권력의 덧없음과 정치적 무능이 초래하는 결과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통치는 단명했지만, 로마 역사의 교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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