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피추는 15세기 중반, 잉카 제국의 전성기 속에서 탄생한 신비로운 고대 도시다. 이 유적은 해발 2,400미터의 안데스 산맥 깊숙한 곳에 자리하며, 수 세기 동안 정글 속에 묻혀 있다가 20세기 초반에야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가 마추피추를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은 곧 ‘누가 이 난공불락의 산악 지대에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쌓아올려 왕권과 신성의 상징을 세웠는가’라는 물음이다. 대부분의 연구자와 고고학자들은 마추피추를 잉카 제국의 위대한 지도자 파차쿠티(Pachacuti) 시대, 잉카인들의 손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본다.
마추피추를 누가 만들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잉카 문명과 그들이 이룩한 제국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잉카 제국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으로, 현재의 페루,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일부와 칠레 북부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뻗어 있었다. 이 제국은 뛰어난 건축술, 농업 기술, 광범한 도로망, 그리고 독특한 정치·종교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특히 건축 분야에서 독보적인 석조기술을 선보였다. 그들의 대표적인 건축술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을 서로 맞물려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별도의 접착제 없이도 무거운 석재가 정교하게 맞물려 지진에도 잘 무너지지 않았다.
마추피추가 건설된 시기는 흔히 15세기 중반으로 추정된다. 이는 바로 잉카 제국의 제9대 사파 잉카(Sapa Inca, 황제)인 파차쿠티가 제국을 크게 확장하고 문화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한 시기와 맞물린다. 파차쿠티는 잉카 제국을 단순한 부족 연합체에서 남미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통합된 제국으로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그는 행정, 종교, 사회 체계를 재정비하였고, 기존의 수도 쿠스코(Cusco)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복지와 영토 확보를 통해 잉카 문명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바로 이 파차쿠티 시기에 마추피추가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는 잉카 제국의 지도층이 새로운 권력의 상징을 원했기 때문이다. 마추피추는 단순히 생활이나 종교 의식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잉카 통치자와 그에 따른 지배층의 권위, 신성성, 그리고 우주관을 반영한 복합적인 거점이었다. 잉카인들은 태양신 인티(Inti)를 비롯한 자연 숭배 신앙과 천문 관측에 기반한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건축물은 이러한 신앙과 우주관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매개체였다.
마추피추의 건축 양식은 잉카식 석조 기법을 정점에 끌어올린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건물과 담장은 자연 바위 지형에 유기적으로 융화되어 있으며, 개별 석재를 맞추는 정교함은 오늘날에도 감탄을 자아낸다. 잉카인들은 무른 석재가 아닌 단단한 화강암이나 안데사이트를 사용했고, 이를 위해 강력한 노동력과 체계적인 운송, 정교한 도구를 활용했다. 이와 같은 기술적 우수성은 마추피추를 현존하는 잉카 유적 가운데에서도 건축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례로 손꼽히게 한다.
또한 마추피추는 단순한 건물들의 집합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구획된 도시 공간이었다. 상부 지역은 신성한 의식과 의례가 거행되는 사원, 제단, 의식용 공간들이 밀집한 ‘성소 구역’으로, 하부 지역은 주거 및 생산 활동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중 신성한 구역에는 태양신전을 비롯해 다양한 제단이 존재했으며, 이로부터 잉카 통치자의 신성한 권위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마추피추가 단순한 휴양지나 피난처가 아니라, 왕실 의례를 수행하고 신성한 축제와 제사를 거행하는 장소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마추피추를 만든 이들이 잉카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 또한 풍부하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발전한 잉카의 독특한 토목 공학적 특징, 그리고 안데스 산악지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잉카 도로망(Qhapaq Ñan)은 마추피추와 다른 잉카 유적지를 연결하고 있다. 마추피추 부근에서도 잉카식 계단식 경작지(terrace), 정교한 수로 시설, 실용과 신앙을 결합한 건축 특징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구조적, 문화적, 기술적 일관성은 마추피추를 건설한 세력이 잉카 제국의 핵심적 권력자들이었음을 방증한다.
특히 파차쿠티는 잉카 제국을 문화적, 종교적, 건축적으로 재정비한 혁신가로서, 마추피추를 통해 제국의 새로운 상징을 창출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파차쿠티 시대에는 잉카 권력이 극적으로 팽창했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중심부인 쿠스코와 주변 지역을 상호 연계하는 중요 거점들이 필요했다. 마추피추는 이 역할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문화적, 전략적 위치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잉카인들은 상징적 장소를 건설하여 새로운 정권과 권위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한편, 종교적 가치를 집약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산악 지대 중에서도 독특한 지형적 특성을 가진 곳을 선정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마추피추였다.
그러나 마추피추가 건설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잉카 제국 내부의 상황 변화나 외부 요인 – 예를 들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입 전야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변동 – 으로 인해 이 도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16세기 중반 스페인의 침략으로 잉카 제국이 붕괴한 후 마추피추는 숲 속에 묻혀 오랜 세월 숨겨진 유적지로 남았다. 잊혀진 채 잠들어 있던 이곳은 1911년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에 의해 다시 세상에 소개되면서 인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고고학적 조사와 연구를 통해 마추피추가 잉카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한층 확신이 더해졌다. 석축 양식, 도시계획, 종교 의례 공간, 도로망과 계단식 밭의 구조 등은 모두 잉카 유적 특유의 특성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마추피추를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적, 문화적, 건축학적, 고고학적 단서를 종합할 때, 잉카 제국의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이끈 파차쿠티 시대의 잉카인들이라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파차쿠티를 비롯한 잉카 지배층이 주도하고, 수많은 장인과 노동자가 참여한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자연과 신, 그리고 인간 세상의 이상적 조화를 표현한 거대한 상징적 작품이었다. 마추피추는 잉카 문명이 꽃피운 창조적 에너지와 기술적 역량, 그리고 정치·종교적 야망이 축적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오래전 안데스 산악지대에 깃든 인간 정신의 정수와 번영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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