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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직지심체요절, 인쇄 혁명의 서막을 열다

by 놀고싶은날 2024.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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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14세기 고려 시대에 인쇄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 문화사적 가치와 독창성이 각광을 받고 있으며, 구텐베르크의 42줄 성서(1455년경)보다 약 70여 년 앞선 기록으로서 인류 인쇄사 전반에 중요한 획을 그은 유산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직지심체요절은 불교 경전의 한 부분으로, 불교의 핵심 사상을 직설적으로 전해 준다. 여기에는 ‘곧바로 마음의 본체를 꿰뚫어보아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화두가 담겨 있으며, 당시 불교 문화의 지적 깊이와 고려 왕조의 기술력을 동시에 보여 주는 상징적 자료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이 제작된 시점은 고려 우왕 3년(1377)으로 알려져 있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인쇄 시점에 따라 상·하권으로 나뉘어 전해지나, 현재 우리가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권뿐이다. 책의 발문에 따르면 충청도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백운화상(白雲和尙)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라는 경전을 편찬하고, 이를 제자인 석찬(釋贊)과 달원(達源)이 함께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흥덕사가 위치한 지역은 일찍이 활판인쇄 기술이 번성했던 곳으로, 인근에는 금속을 제련하기 위한 자원과 인쇄 공정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이 존재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지역적·기술적 기반이 고려 후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금속활자 인쇄술이란 모래나 흙, 혹은 금속으로 활자를 주조한 뒤 이를 조합·조판해 찍어내는 방식을 말한다. 목판 인쇄와 달리, 글자 단위로 분해·재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목판 인쇄는 동일한 내용을 대량으로 찍어 내기에는 효과적이나, 판 자체를 새기는 과정이 까다롭고 글자를 일부만 수정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금속활자는 필요한 글자를 개별적으로 만들고, 이를 조합해 인쇄하므로 편집·교정이 훨씬 수월해진다. 고려 시대에는 이미 13세기 무렵부터 금속활자 인쇄가 이뤄졌다는 사료가 있으나, 실물로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직지심체요절이 사실상 최초다.

직지심체요절은 그 자체로 고려의 지적·문화적 수준을 웅변해 줄 뿐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의 활자 인쇄술 발전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단서를 제공한다. 고려는 당시 송(宋)·원(元)·일본 등 인접국과 활발히 문화 교류를 펼치며, 왕실 차원에서 대장경 인쇄 사업 등을 통해 인쇄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교류와 경쟁 속에서 탄생한 직지심체요절은, 비단 기술적 성취뿐 아니라 불교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식 전파 체계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는 사실까지 아우르는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우리 손에서 한동안 사라진 까닭은 고려 말·조선 초의 역사적 혼란을 비롯해 외세 간섭과 전란 등이 뒤섞인 탓이 크다. 이후 직지심체요절은 19세기 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조선에서 수집해 간 문화재 가운데 포함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플랑시의 수집품들은 이후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에 기증 혹은 매매 형식으로 넘어갔고, 직지심체요절 하권이 그곳에서 한동안 묻혀 지내다가 20세기 초 학계에 재발견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 있는 점은 문화재 환수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중요한 이슈다. 한국 정부와 학계, 민간 단체들 사이에서는 지속적으로 원본 귀환을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귀중한 책이 보존 상태가 양호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직지심체요절 하권은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되고 있으며, 디지털화된 이미지를 통해 전 세계 연구자와 독자들이 접할 수 있다. 2001년, 직지심체요절은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 등재되며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인류 인쇄사와 지식 전파 역사에 있어 직지심체요절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독보적인지를 입증해 준다.

직지심체요절이 담고 있는 사상적 내용 역시 흥미롭다. 조계종 불교의 선(禪) 사상에 뿌리를 둔 이 경전은, 부처의 가르침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 핵심 모토다. 복잡한 교리 대신 스스로의 마음을 꿰뚫어 번뇌를 끊고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깨달음의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하다. 이런 점에서 직지심체요절은 그저 책이나 인쇄본을 넘어, 당대 고려 불교계의 철학적 통찰과 종교적 열망을 그대로 담아 낸 정신적 유산이기도 하다.

오늘날 직지심체요절의 의의는 크게 두 갈래로 요약된다. 첫째, 기술사적으로 볼 때 직지심체요절은 서양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기술보다 반세기 이상 앞선 금속활자 인쇄 문화가 고려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준다. 이는 동아시아 문명권이 고도로 발전한 지식 생산 체계를 일찍부터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구체적 사례다. 둘째, 불교사와 사상사 측면에서 볼 때도 이 책은 당대 고려인의 신앙적 열망과 철학적 관심을 담은 중요한 텍스트다. 비록 전란과 왕조 교체, 식민 지배와 근대 문물 충돌 등 굴곡진 역사를 거치며 본래 위치를 잃어버렸으나, 종교 서적이자 예술품이자 기록유산이라는 삼중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직지심체요절과 관련된 학술 연구와 문화 콘텐츠 개발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청주 고인쇄박물관을 비롯해 각종 전시와 행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의 복제본과 함께 인쇄술 재현 과정을 소개하기도 한다. 관광객과 학생들에게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을 실제로 간접 체험함으로써, 그 역사적 위용과 의미를 체감하는 기회가 된다. 또한, 국내외 학자들은 이 책이 놓인 배경과 인쇄 기법, 인문학적 메시지를 더 깊이 파고들며, 동양과 서양 인쇄술의 교류와 영향을 탐색하기 위한 연결고리로 삼고 있다.

직지심체요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서' 수준의 문화재가 아니라, 한국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지식 유산이다. 그 안에는 고려 후기 사람들의 삶과 사상, 기술력이 오롯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계사적 시각으로 봐도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인쇄 혁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 보관 중인 실물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문제는 단순히 국가 간 외교나 법적 문제를 넘어, 인류 유산을 원소유국과 함께 공존의 방식으로 보존·공유할 수 있느냐는 보편적 과제이기도 하다.

결국 직지심체요절은 형식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어를 뛰어넘어, 기술 문명과 종교·사상이 어우러진 복합적 문화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려라는 왕조가 꽃피운 인쇄술의 정점이자, 불교적 깨달음이 응축된 성찰의 기록물이며, 동시에 인류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이 얼마나 획기적·창의적으로 진화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귀중한 사례다. 이 책 한 권이 담고 있는 가치는 시대를 초월해 계속해서 빛을 발할 것이며, 더 나아가 동아시아 문명과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 문화가 지닌 저력을 증명하는 역할을 앞으로도 계속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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