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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8~1541)는 스페인의 탐험가이자 정복자(Conquistador)로, 1532년 잉카 제국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스페인 식민지로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극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를 포로로 잡았으며, 금과 은을 대가로 엄청난 부를 획득한 뒤 결국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피사로의 정복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식민 지배를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원주민 문화와 사회를 파괴하고, 수많은 원주민을 학살한 잔혹한 역사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생애와 잉카 제국 정복 과정, 그리고 그가 남긴 영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피사로의 출생과 초기 생애
① 가난한 가문의 출생
-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478년경, 스페인 트루히요(Trujillo)에서 태어났습니다.
- 그는 귀족이 아닌 가난한 군인의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어려서부터 가축을 돌보는 등 힘든 노동을 하며 자랐으며, 젊은 시절에는 군인 생활을 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② 신대륙으로의 모험
- 1502년, 피사로는 신대륙(아메리카)에서 기회를 찾기 위해 스페인의 정복자 오헤다(Alonso de Ojeda)의 탐험대에 합류하여 현재의 콜롬비아 지역 탐험에 참여하였습니다.
- 이후 그는 1513년,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와 함께 파나마 지역을 탐험하며 태평양을 발견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였습니다.
- 1519년에는 파나마 식민지 개척에 참여하며, 이곳에서 식민 행정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2. 잉카 제국 정복 과정
① 잉카 제국에 대한 관심과 첫 번째 원정(1524~1526)
- 피사로는 남쪽에 엄청난 금과 은을 가진 부유한 제국이 존재한다는 소문(잉카 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1524년과 1526년, 그는 첫 번째 잉카 원정을 떠났으나, 원주민들의 저항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 하지만 탐험 과정에서 잉카 제국의 부유함과 정치적 혼란(내전)을 확인하였으며, 더 큰 원정을 준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② 스페인 왕실의 지원 확보(1528~1530)
-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게 잉카 정복 계획을 제안하였습니다.
- 그는 왕실로부터 병력과 장비, 총독 지위를 약속받았고, 1530년 다시 신대륙으로 출발하여 본격적인 정복을 준비하였습니다.
③ 카하마르카 전투와 잉카 황제 포로(1532년)
- 1532년, 피사로는 168명의 병사, 27마리의 말, 화약 무기만을 이끌고 잉카 제국으로 진격하였습니다.
- 당시 잉카 제국은 내전(아타우알파 vs. 우아스카르)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피사로는 이를 이용하여 카하마르카(Cajamarca)에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8만 명 이상의 잉카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며,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④ 몸값으로 금과 은을 요구(1533년)
- 피사로는 아타우알파를 석방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거대한 방을 금과 은으로 가득 채우라는 몸값을 요구하였습니다.
- 잉카인들은 엄청난 양의 금(약 6,000kg)과 은(약 12,000kg)을 스페인군에게 바쳤지만, 피사로는 약속을 어기고 아타우알파를 처형하였습니다.
⑤ 잉카 수도 쿠스코 함락(1533년)
- 아타우알파가 사망하자, 잉카 제국은 급격히 무너졌고, 피사로는 수도 쿠스코(Cuzco)를 점령하며 잉카 제국을 사실상 정복하였습니다.
- 이후 1535년, 새로운 수도 리마(Lima)를 건설하여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3. 피사로의 최후와 유산
① 피사로의 암살(1541년)
- 피사로는 잉카 정복 후에도 식민지 통치를 지속했지만, 내부 권력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 1538년, 동료 정복자 디에고 데 알마그로(Diego de Almagro)와 권력 다툼을 벌였으며, 결국 알마그로를 처형하였습니다.
- 하지만 1541년,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이 리마에서 피사로를 습격하여 암살하였으며, 피사로는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② 피사로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 스페인 제국의 남아메리카 지배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리마는 이후 페루 부왕령(Viceroyalty of Peru)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스페인으로 가져와 유럽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세계 경제 질서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하지만, 잔인한 방식으로 잉카 문명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평가도 많습니다.
4.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역사적 평가
① 긍정적 평가
✅ 탁월한 전략가와 지도력
- 극소수의 병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린 전략과 지휘력이 뛰어났음.
- 내전을 이용하고, 심리전을 펼치는 등 정복자(Conquistador)로서 능력을 발휘함.
✅ 스페인 제국 확장 기여
- 피사로의 정복은 스페인이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음.
- 리마 건설을 통해 남미 식민 행정의 기초를 마련함.
② 부정적 평가
❌ 극도의 잔인함과 배신
-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에게 몸값을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처형함.
- 잉카의 문화와 유산을 파괴하고, 원주민을 강제 노동에 동원함.
❌ 탐욕과 권력 다툼
- 잉카의 금과 은을 독점하려 하며 동료 정복자들과 권력 싸움을 벌임.
- 결국 내부 갈등으로 인해 동료들에게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음.
5. 마무리하며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극소수의 병력으로 잉카 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의 정복자로,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복 방식은 잔인하고 파괴적이었으며, 원주민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가 세운 리마는 현재도 페루의 수도로 남아 있으며, 잉카 문명의 유적들은 여전히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피사로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정복자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탐욕과 잔혹함의 상징적인 인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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