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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남미 도주

by 놀고싶은날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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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

작은 글씨: 1945년 나치 패망과 전범들의 도주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나치 정권의 주요 인물들은 연합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일부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처벌을 받았지만, 많은 전범들은 유럽을 떠나 남미로 도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남미는 나치 전범들에게 유리한 피난처였습니다.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고, 일부 국가에서는 반공주의를 이유로 나치 인사들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 등은 나치 도망자들이 정착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남미로의 탈출 경로

작은 글씨: 바티칸과 아르헨티나 정부의 도움
나치 전범들은 유럽을 떠나기 위해 다양한 탈출 경로를 이용했습니다. 대표적인 루트는 이탈리아를 경유하는 **"라트라인(Ratlines)"**이라는 비밀 탈출망이었습니다.

라트라인은 바티칸과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전범들은 바티칸 여권을 사용해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이동한 후, 배를 타고 남미로 건너갔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대통령은 반공주의를 이유로 나치 전범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남미로 도망친 주요 전범

작은 글씨: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 등
남미로 도망친 대표적인 나치 전범들 중 몇 명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의 주범 중 하나로,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2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 요제프 멩겔레: 아우슈비츠에서 비인도적인 실험을 수행한 악명 높은 의사입니다. 브라질로 도망쳐 1979년 익사로 사망할 때까지 신분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 클라우스 바르비: "리옹의 도살자"로 불렸던 게슈타포 요원으로, 볼리비아에서 CIA의 도움을 받아 활동했습니다. 1983년 프랑스로 송환되어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나치 전범들이 신분을 바꾸거나 독일계 이민자 사회에 숨어 살아갔습니다.

남미 국가들의 태도

작은 글씨: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지원
남미 국가들은 나치 전범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 대통령은 나치 과학자들과 군사 기술자들을 받아들여 산업 발전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역시 반공주의를 이유로 나치 전범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파라과이의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는 독일계 혈통을 가졌으며, 나치 인사들을 보호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이 커지면서, 남미 국가들은 일부 전범들을 체포하거나 인도해야 했습니다.

전범 추적과 체포

작은 글씨: 모사드와 사냥꾼들의 역할
전범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와 개인적인 전범 사냥꾼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모사드는 1960년 아돌프 아이히만을 찾아내어 체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독일 정부는 전범들을 추적하며 국제적인 수배를 진행했습니다.

유명한 전범 사냥꾼인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여러 나치 전범을 추적하며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의 활동은 나치 전범들이 숨어 사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일부 전범들은 결국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나치 전범들은 남미로 도피하여 오랫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이들의 도주는 바티칸, 남미 정부, 반공주의 세력의 도움으로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노력과 전범 사냥꾼들의 활동으로 인해 일부 전범들은 결국 정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치 전범들의 남미 도주는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사례이며, 오늘날에도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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